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019.

 날이 흐리다. 비가 오려나. 어릴 적 살던 집은 그린벨트로 묶여있었다. 마을 앞에 냇물이 하나 흐르고 있었는데, 장마가 오면 자주 넘치곤 했다. 가끔은 심각하게 넘치곤 했으나 정말로 심각해진 적은 없었다.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그 집의 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. 잘 정돈된 마당이 아니었고, 시멘트 같은 걸 발라놓지도 않은 온전한 흙으로 된 마당이어서 비가 오면 물길이 생겼다. 마당의 굴곡을 따라 강이나 냇물처럼 빗물은 대문쪽으로 흘러갔다. 대문을 넘어간 물은 마을 앞 길을 지나 냇물로 흘러들었다. 그 물길을 보는 것이 좋았다. 세계지도를 보는 기분이었다. 뒷마당에서, 마루 앞에서 작은 샛길을 따라 물들이 흘러갔고 작은 물길들은 깊게 패인 마당의 물길로 모여들었다.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세계 4대 문명발상지에 대해 배웠을 때 나는 우리집 마당을 떠올렸다. 평소엔 드러나지 않다가 비가 오면 마당에 생겨나는 강물을 생각했다. 지붕과 마당과 텃밭에 있는 작물의 잎사귀와 뒷뜰의 살구나무와 마을 앞 냇물과 흘러가는 빗물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모두 달랐다. 밤에는 개구리와 귀뚜라미가 자주 울었고,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마을 뒷 산에 있는 대나무 사이를 바람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. 그리고 집 벽에 아버지가 걸어둔 괭과리가 부딪히는 소리도 함께. 개들은 개집이나 들어가거나 마루 밑에 움푹 파놓은 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잠을 자거나 내리는 비를 보거나, 내리는 비를 보는 나를 보곤 했다. 나는 그 시절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.